건설법의 변천사5 - 도시개발사업
1920년대 중반 대륙진출에 열을 올리던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관동대지진으로 알려져 있는 이 지진에 의해 동경 시가지의 3/4이 파괴됐고 수많은 인명이 상했다. 이 불행한 사건은 그러나 역사의 긴 관점에서 보면 동경시가지를 도시계획적으로 크게 개조하는 데 일조(一助)하는 역할도 했다. 그 당시 동경시장이었던 고토 신페이는 이미 1919년 일본의 도시계획법을 제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정치가였는데, 그가 만들어 놓은 법률 속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이라는 매력적인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제도는 나대지가 많은 도시 주변부에서 널리 택지를 조성하기 위한 적극적인 수단이었다.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자 구획정리사업이 적극적으로 활용되면서 기성시가지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구획정리와 기반시설의 설치가 가능해졌을 것이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에서 활용됐던 구획정리수법은 1934년 총독부령인 조선시가지계획령을 근거로 식민지 조선의 공식제도로 채택됐고 이 제도는 만주로 진출하기 위한 일본에 의해 활발하게 사용됐다. 서울을 비롯해 광주, 부산 등지에서 진행됐던 사업에서 논, 밭, 임야는 반듯한 대로를 중심으로 장방형의 필지들을 확보하고 그 주변에 학교나 공원 등을 설치하는 것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일반적 방식이었다. 장방형의 필지들은 일반에 매각되거나 원래 토지소유자에게 환지해주는 방식으로 사업비용이 충당됐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62년 도시계획법이 제정될 때 도시계획법에 속했다가, 1966년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이라는 명칭의 법률로 독립된다. 1960년대 후반 3선 개헌과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정치적 이슈에 묶여 제3한강교(한남대교) 남쪽의 강남이 개발될 때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이 그 근거법으로 작동했다. 영동의 800만평과 잠실을 400만평을 개발했던 사업시행자는 서울시였으며, 토지소유자는 대부분 개인들이었다. 환지방식으로 진행됐던 이 사업에서 논밭이 모두 주택지로 바뀌고 필지규모가 작아지면서 토지소유자들에게 다시 환지된 땅 못지않게 사업시행자에게 귀속된 땅도 많았다. 사업시행자였던 서울시는 이렇게 남아도는 필지들을 아파트용 주택단지로 매각해서 사업비용을 충당했고 그 지상에 지금의 강남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이렇게 서울의 대부분 시가지에서 택지를 개발하는 역할을 했던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은 1980년 신군부가 제정한 ‘택지개발촉진법’에 의해 사실상 폐기됐다. 1981년 개포지구에서 서울시가 시행한 구획정리사업을 끝으로 정부가 서울시에게 더 이상의 구획정리사업을 허용하지 않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또 전면수용방식에 의해 소유자를 간명하게 쫓아 낼 수 있는 택지개발촉진법은 토지공사와 주택공사에게 매우 편리한 법률이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채택하는 환지방식은 사업의 초기에 존재하는 토지소유자의 소유권을 최대한 존중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택지개발촉진법에 비해 법적으로 우수한 점이 많았다. 1990년 다시 구획정리사업을 살리기 위해 도시개발법이 제정됐지만, 환지방식과 함께 수용방식이라는 수단을 도입해서 오히려 전통적인 구획정리사업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우를 범했다. 현재 진행되는 대부분의 도시개발사업은 환지방식이 아닌 수용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구획정리사업이라기보다는 민간이 시행자가 되는 택지개발사업에 더 가깝게 운용되고 있다. 택지개발촉진법의 폭력성은 공영개발이라는 점에서 완화된다지만, 도시개발법에 의한 수용방식은 무슨 근거로 헌법 앞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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