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 방치된 재개발구역의 위험성
1970년대 접어들면서 불량 정착촌을 정비하기 위한 재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서울시를 비롯한 대도시에 재개발구역이 지정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며, 당시에 구역을 지정하기 위한 근거법은 도시재개발법이었다. 이렇게 한번 지정된 재개발구역은 시간이 흘러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해제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된다. 2003년 재개발과 재건축을 통합하는 법률로서 도시정비법이 제정됐지만, 구법에 의해 지정된 채 방치되고 있는 재개발구역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없다.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 통상 조합이 결성되고 사업이 진행돼, 노후·불량 건축물이 철거되고 새로운 공동주택이 건설된다. 그러나 모든 재개발구역에서 활발하게 사업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사업성이 높지 않거나 주민간에 의견이 통일되지 않으면 사업이 전혀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입장에서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 한 아무리 재개발구역이라 해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재개발구역의 지정은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한 도시관리계획(예전의 도시계획)으로 의제되고 그 법적 효력이 막강하다. 당해 지역은 장차 재개발사업이 진행될 것이므로 재개발사업의 진행에 방해가 될 수 있는 건축물의 신축, 개축 등이 금지되는 것이다.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사업장을 전제로 부여되는 법적 효력이지만, 이러한 효력은 방치된 재개발구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재개발구역을 지정했지만 사업이 진행되지 않는 구역의 슬럼화는 법적으로 이미 예정된 것이며, 도시의 슬럼화를 극복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가 슬럼화를 촉진시키는 기능을 하는 아이러니가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구역이 지정된 후 20~30년간 사업이 시행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재개발구역이 도시마다 상당수에 이른다. 이러한 곳은 형식적으로는 재개발구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재개발구역이 아니고, 법적으로 보면 구역지정의 효력도 거의 상실된 단계에 이른 곳들이다. 그러나 개발사업자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30년 가까이 방치된 재개발구역내에서 이미 존재하는 구역지정 상태를 활용하는 것이 매우 매력적일 수 있다. 법적으로 보면 재개발구역이 이미 지정돼 있는 지역이므로 초기의 복잡한 절차를 모두 생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면 오랜 기간 사업이 좌절돼 더 이상 재개발사업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던 지역에서 새로운 사업이 진행되지만, 이러한 사업은 초기에 구역을 지정할 때 상정하던 사업과 동일성을 발견하기도 어렵고 사업의 환경도 서로 다르다. 단지 현재의 사업이 30년 전의 외투를 편의에 따라 걸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재개발구역에 있어 사업은 일정한 단계까지 은밀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으므로 당해 지역내 토지나 건축물소유자는 전혀 예기하지 못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재개발구역이 방치될 때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인데, 이는 도시환경정비사업(구도심재개발)에서 특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또 재개발구역이 오랜 기간 방치되면 당해 구역내 정비기반시설 또는 도시계획시설이 설치될 예정부지의 토지소유자는 과도한 재산권의 제약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시설부지의 토지소유자는 도시계획시설예정부지의 소유자로서 매우 강한 재산권제약을 받지만, 당해 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발생하는 손실을 고스란히 짊어지게 된다. 법적으로 보면 이러한 시설은 국가나 자치단체가 설치하는 도시계획시설이 아니고 재개발사업의 시행자(통상 조합)가 자신의 비용으로 설치해야 하는 정비기반시설이다. 조합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시설을 설치할 주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해 토지위에 존재하는 도시계획시설결정은 통상적인 예정도로와 마찬가지로 재산권을 강하게 제약하는 효력을 갖는다. 방치된 재개발구역이 발생시키는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이다.
택지개발촉진법에 의한 구역지정은 사업이 진행되지 않는 경우를 예정해서 2년 또는 3년 기간을 정해 놓고 구역지정을 해제하도록 정하고 있고(동법 제3조제3항), 도시개발법도 역시 비슷한 규정을 마련해 놓고 있다(동법 제10조). 구역의 지정이 도시관리계획으로 의제되는 것을 감안해 일정한 기간 안에 사업이 진행되지 않으면 구역지정의 효력을 거두어들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제도들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장치가 도시정비법에 마련돼 있지 않다는 점은 심각한 입법적 결함이며, 법률의 개정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비록 법률의 개정 이전이라 해도 구역이 지정되고 20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 예전의 구역을 활용해서 진행되는 사업에 대해서는 행정청이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야 할 것이다. 또 오랜 기간 방치돼 재산권을 크게 제약하고 있는 도시계획시설결정에 대해서는 직권으로 이를 취소하거나 또는 토지소유자의 재산권행사를 가급적 너그럽게 허용하는 해석자세가 필요하다.